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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디엄의 信仰2009. 9. 18. 10:19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마지막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는 당부였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험의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십자가의 형벌을 받는 순간에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육체의 연약함에 싸인 채로 
하나님 아버지께 심한 눈물과 통곡의 간구를 드렸던 예수 그리스도.

그 눈물의 마지막 한 방울은 결국 '순종의 눈물'이었다.
슬픔과 고통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승화되어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마침표를 찍음에 있어서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아닌 순종의 모습으로, 담대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마무리하셨다.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의 모범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에 대해 히브리서 4장 14-5장10절까지의 말씀에서 명확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sympathize)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본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찌르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영어의 의미가 더욱 와 닿는다-교감하다, 공감하다, ~와 슬픔을 같이 하다 등)하신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그 분은 절대자로서,인간과 전혀 다른 차원의 모습과 방법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입은 형상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 이유는 사람과 같이 되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800여 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예언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지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3장의 이른바 '종의 노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영혼을 버리신 것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신적 완선정을 지닌 인간으로써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그 자신의 육신을 통하여 아셨다.
죄의 삯인 사망을 그 자신의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예수께선 많은 사람의 죄를 친히 담당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셨다는 점에 대해서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교 자체는 불가능하지만. 
이명박 내각이 들어서자 일각에서 '부자내각'이라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그들 자신이 서민들의 삶을 알지 못하고(물론 그들도 청년시절의 고학과 배고픔을 경험했지만)
어떻게 서민들의 눈높이에서 서민을 바라볼 수 있냐는 것이 비판자들의 논리였다.
이 비판은 지금까지도 거세다. 친서민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서민들의 삶의 질은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
정부의 정책과 서민의 현실과 여전히 격차가 있다는 말이다.
서민을 모르면서 서민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에 통치자와 권위자의 모순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통치자로서 이 땅에 군림하기 위에 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유는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기 위함이었다.
예수깨서 신적인 이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보이셨으나
이것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마태복음 28:28, 마가복음 10:45)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죄인인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심이었고,
그 방법으로써 사람들을 섬기며 종국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순종을 가로막는 마지막 시험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잘 드러난다.
예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심은 그가 제물로써 드려지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세례는 죄인인 인간에게 행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이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기 때문이었다(마태복음3:15).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에 짊어지게 될 사람들의 죄악을 담당하고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원하시는 바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칼로 그를 죽이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가 이삭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에 대하여는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상세하게 풀이되어있다. 꼭 보기 바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간구한 것은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때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첫번째, 육신의 필요에 대한 시험(돌이 떡이 되게 하라),
두번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시험(성전에서 뛰어내리라)
세번째, 믿음과 경배의 대상에 대한 시험(나에게 절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
이렇게 세 가지였다.
이 시험들은 예수께서 가지신 인성과 신성 모두를 공격하는 시험이었다.
배고픔이라는 본능을 해결해야 하는 육체의 연약함,
하나님 아버지께서 극한 상황에서 아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시편 말씀의 권위를 빙자한 두 위격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시험,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반역하여 타락한, 피조물의 조물주에 대한 반역에의 동참.

이 시험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흐트러뜨리는 시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인간으로 폄하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을 앞에 두고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
예수께서 당하실 고통 중의 고통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드렸던 요나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겪으신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사흘 동안 음부에 내려감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이었다.
예수께서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음부에 떨어질 운명에 처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당되는 표적이다.
그들은 음부에 영원히 갇혀 있을 것이나, 예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사흘만에 육지로 나온 것과 동일하게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에 예수께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
즉, 이미 죽은 영혼들에게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 선포는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시리라는 내용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에 대하여, 고통하고 번뇌하셨다.
세상 모든 육체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죽는, 육체가 못박히고 창에 찔리는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에 단절되는 것.
죄의 삯인 사망의 결과가 아들인 자신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
진실로 내가 아들이면서도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실 수는 없습니까?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아들의 본분과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사이에서 예수께서는 고되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받으신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는 잔을 마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리고 곁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베드로에게 하신 당부의 말씀이 이것이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장 40-41절)

예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곧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부활이시며 생명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 세 번이나 들었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던 사실에 우리는 충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연약함에 싸여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고통 속에서 눈물흘리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것에 대해
제자들은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기도가 자신들의 죄를 사하시려 이 땅에 오신 그들의 스승이 머지않아 마시게 될 진노의 잔 앞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이 세상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과 아픔의 마지막 고백임을 그들은 알기나 했을까.

믿는 자들이 한 시간도 하나님 앞에 깨어 있지 못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는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육체의 연약함을 이기는 힘은, 육신의 정욕과 믿음없음을 벗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깨어 기도하는 것 뿐이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슴에 새기자.
우리의 영적인 수면의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죄는 우리의 육신을 틈타고 왕성하게 활동한다.
반대로 우리의 영적인 수면의 시간 짧아지면 질수록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타고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힘은 생명의 성령의 법 뿐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원칙적으로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누구의 죄도 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사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다만 우리는 죄를 용서할 수는 있다. 죄 용서는 죄를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죄 지은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를 지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기 때문이며
그의 죄 또한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죄 사함 받은 자의 합당한 태도다.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며, 지금은 용서받은 죄인이다.
여전히 죄가 많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다. 우리의 죄가 사해짐은 죄로 인한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이지,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죄의 유혹과 시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고,
사탄은 끊임없이 용서하지 못하게 하며 미워하게 하며 저주하게 만든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드리신 기도의 맥락을 주기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완성됐다.
그리고 이 완성은 주기도문을 고백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순종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에 대해서 간구한다.
시험에 들지 않음이 곧 악으로부터의 구원임을 또한 고백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죄를 지으며 그로 인해 악한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기서 말하는 '우리'란 엄밀히 말하자면 믿는 자를 의미한다. 신앙이 없이는 주기도문은 주문에 불과하다)

기도해야 할 것이 참 많다.
우리의 건강, 믿음, 관계, 비전, 근심거리, 그 밖에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들.
그러나 가장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갈망과 그 통로가 우리의 순종인 것과
이 순종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음을 알고
간절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 진실한 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포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진실한 자가 되기 위하여 날마나 기도로써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을 죽이고
성령의 법에 이끌림을 받도록 노력하자. 기도가 되지 않을 때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막힐 때 기도를 뚫는 것은 오직 기도다. 쉬지 않고 깨어 드려지는 기도는 우리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된다.
맹목적이고 개인의 목적 지향적인 기도는 잠시 내려놓더라도, 우리의 근원 되시며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이 지속적이고도 깊어지기를 간절히 구하자.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겨우 사흘 끊어지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신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고 살아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찢어지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 스스로의 무뎌진 마음과 믿음 없음에 대하여 절로 탄식과 눈물이 흐르는 오늘 아침이다.
매일 울 수밖에 없고 동시에 웃을 수밖에 없는 삶이 우리네 삶이다.
이 감정의 기복이 세상이 우리를 향한 손가락질과 비난의 대상이 될지언정,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한 슬픔과 그 죄악을 여전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앞에
날마나 울고 웃는 인생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울음 대신 영원한 기쁨을 주실 날을 고대해본다. 



Posted by 카르페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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